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 분할 (문단 편집) === 6.25 전쟁 당시 === 당시 [[6.25 전쟁]]이 발발하고 나서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로, 한미 연합군은 중국이 예상한 것처럼 '''평양-원산[* 실제 중국이 11월 대공세 당시 최종 목표로 한 게 이 정도였다. 한국군과 UN군이 지나치게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몰랐기에 이 정도 선에서 방어를 할 것이라 보았고, 보급 및 작전 계획도 거기까지는 확실하게 짜여 있었다. 중공군도 당연히 유엔군이 북한 전체를 쉽사리 포기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.[* 실제로 중공군의 총사령관 [[펑더화이]]는 유엔군이 평양을 너무 빨리 포기하였다고 생각해 놀랐다.] 1월 공세에서의 패배는 무리수를 두다가 깨진 쪽에 가깝다.]선(혹은 청천강-함흥)'''에서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. 실제 중국은 1950년 [[6.25 전쟁]] 개입을 통해서 이걸 해냈고 이것을 중국의 예방전쟁 성격의 군사력 투사로 해석하고 있으며 스스로 이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. 그리고 [[중국 인민지원군#s-5.7|한국전쟁의 정전 이후 중국은 주한미군을 핑계로 중국군을 영구 주둔하려고 했다.]] 또한 중국군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유엔군 역시 북한 분할의 영역인 평양-원산선의 경우 한국전쟁 때 1950년 11월 총공세 좌절과 중공군 참전 이후 [[1.4 후퇴]] 이전 검토했던 전선이었으며 전쟁 도중 39도선의 북진을 수차례 검토하였다. 우선 1950년 12월 평양-원산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지하는 전략 전술은 중국조차도 예상한 것이었으며, 실제로 방어가 가능한 상황이었다. 또한 휴전 협상이 시작한 후에도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동부 전선에서 북진하여 [[통천군]], [[금강산]]을 점령하고 평양-원산선 이북으로 전선을 대치시키다는 이른바 [[맹조의 발톱 작전]]을 구상하였으며 실현되었을 경우 머지않아서 39도선으로써의 북진 작전이 개시되었을 것이다. 실제로 평양-원산만선, 청천강-함흥만선은 [[삼팔선]]이나 현재의 [[군사분계선|휴전선]]보다 오히려 방어선이 더 좁아지기 때문에 압록강-두만강에서 중국군이 쳐내려왔듯이 중국군이 유엔군의 틈을 노리는 것이 어려웠으며, 유엔군이 제때 병력 재건에 성공했으면 종전선에서 벌어질 고지 쟁탈전이 38선에서 39~40도선으로 북상해서 치뤄졌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